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문단 편집) === 소련군의 하르코프 탈환과 만슈타인의 계획 === 2월 8일, 로스토프에서는 소련군 제2근위군과 제28군이 접근하자 제4기갑군과 홀리트 분견군이 2월 8일을 기해 로스토프에서 철수해 미우스 강 서안으로 밀려났다. 2월 9일에 소련 제6군, 제3전차군과 제12전차군단은 야음을 틈타 도네츠 강 도하에 성공하여 하르코프 동쪽의 LSSAH의 방어선을 강타했다. 하지만 [[요제프 디트리히]]가 이끄는 LSSAH의 강력한 분전으로 제3전차군의 진격속도가 둔화된다. 제3전차군의 발목을 잡는데 성공한 LSSAH는 14일에 하르코프 시로 철수했다. 그로스도이칠란드 사단과 168사단도 벨고로드에서 서서히 철수했으나, 그로스도이칠란드 사단은 철군 중 소련군의 공격을 받아 169사단이 하르코프 북부의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남서로 이동하는 동안 남부로 후퇴하고 말았다. 2월 10일, 상술했듯 소련의 모스칼렌코의 제40군이 독일 제169사단을 축출하여 벨고로드를 완전히 점령하고, 도네츠 강 도하를 위한 준비를 마쳤다. 한편 벨고로드가 함락되자 란츠는 하르코프 동부의 독일군이 포위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하르코프 시 내로 철수시킬 것을 명령했다. 명령에 따라 LSSAH와 다스 라이히, 제168사단은 하르코프로 철수했고 대독일사단은 벨고로드와 하르코프를 잇는 도로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2월 11일, LSSAH 사단과 1개의 다스 라이히 사단 소속 기갑척탄연대는 하르코프 남동쪽에서 소련군에게 공격당해 3일동안 30마일의 진격을 허용하며 적의 공세에 밀려난다. 소련의 제6기병군단이 그들의 우월한 험지기동능력을 이용하여 독일 전차들을 깨끗이 쓸어버렸다. 2월 12일, 포포프 기동집단이 크라스노아르메스카야에 도달했다. 2월 15일에 남서전선군 사령관 바투틴은 새롭게 들어온 2개 전차 군단을 추가증원하여, 파블로그라드를 관통하여 드네프르 강 상류에 있는 자포로제를 목표로 진격을 시도하여 하르코프 후방을 장악하려한다. 여담으로 자포로제는 교통의 요충지로 로스토프로 향하는 철도, 도로의 허브이자 당시 돈 집단군, 제4 항공군의 사령부가 있는 엄청나게 중요한 도시였다. 2월 13일, 소련의 제4전차군단은 독일군의 방어선을 뚫고 하르코프 북쪽외곽에 방어라인을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란츠는 소련군에 대한 반격을 명령하고 하르코프의 방어선 정비를 위해 최대한 시간을 끌도록 했다. 2월 14일, 6기병군단을 추격하던 그로스도이칠란트와 SS들은 벨고로드-하르코프의 철로를 따라 진격한 소련 제40군의 맹렬한 공격에 직면했다. 소련의 제183소총사단이 도시 북부 수미 인근에 도착했고, 곧 이어 2개의 사단이 추가로 도착했다. 40군의 잔여병력들은 하르코프 후방의 남서쪽으로 이동하였고, 같이 진격하던 제3전차군은 하르코프 외곽에 도시로 진입가능한 6마일의 회랑을 개척했다. 한편 같은 14일자, 하르코프 남쪽의 로스토프에서는 소련의 남부전선군 예하 제2근위군, 제28군이 독일 제1기갑군의 잔존 병력과 시가전을 치르며 결국 로스토프를 탈환했다. 하지만 이제까지 로스토프에서 지연방어로 시간을 버는데 성공한 클라이스트의 A 집단군은 1기갑군, 제17군을 포함해 무사히 후퇴하는데 성공했다.[* 클라이스트는 그 공으로 원수로 승진했는데 후퇴에 노이로제를 보이던 히틀러가 후퇴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며 그 공을 치하하고 승진시킨 드문 예였다.] 2월 15일, SS 군단의 기갑부대들은 더 이상의 도시 외부에서 교전을 포기하고 하르코프로 귀환한다. 아직 하르코프 자체는 독일군이 차지하고 있었지만 곧 소련군이 결국 도심 진입에 성공하게 된다. 이에 독일군은 대독일사단을 서쪽, 다스 라이히는 북쪽, 증강된 LSSAH 1개연대는 동쪽, 320사단은 남동쪽에 배치하여 방어를 명령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SS기갑군단장 하우서는 결단을 내렸다. 시가전에서 무의미하게 기갑자산을 까먹느니 하르코프를 빠져나가겠다며 란츠에게 통보한 것이다. 뒤늦게 하우서의 탈출 통보를 접한 란츠는 기겁을 하며 SS 기갑군단의 탈출을 중지시켰다. 그러나 소련군이 도심으로 밀려들자 결국 후퇴를 승인한다. 북부 교외의 다스 라이히 사단이 우선 후퇴하자 소련군이 그 틈으로 쇄도해 들어갔고 다스 라이히 소속 기갑척탄병들은 소련군 제160소총사단과 제16전차군단을 맞서 분전했지만 공격을 막아내는데 실패했다. 2월 16일, 마침내 소련군은 하르코프를 탈환했다. 하우서의 탈출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엄청나게 분노했다. 히틀러는 란츠가 하우서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며 란츠를 해임하고 그 자리에 캠프 분견군을 지휘하고 있던 [[베르너 켐프]] 대장을 임명했다. 이때 란츠 분견군도 켐프 분견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2월 17일, --개빡친-- 히틀러는 만슈타인의 조인트를 까러 직접 남부집단군 사령부가 있는 자포로제로 수송기를 타고 날아갔다.[* 실제 히틀러는 만슈타인을 해임해 버리고 자신이 직접 남부집단군을 지휘하겠다는 생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만슈타인의 브리핑을 듣자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 아직까지는 완전히 정신줄을 놓은 상태가 아니었던 히틀러는 후퇴건에 대해서 란츠의 해임으로 마무리하고, 하우서의 처벌과 현지사수 명령을 철회하게 되었다. 2월 18일, 그러는 동안 하르코프의 켐프 분견군과 로스토프에서 퇴각한 제1기갑군 사이로 하리토노프 중장의 소련 제6군이 맹렬한 공세를 감행하여 마침내 두 야전군 사이를 갈라놓기 시작했다. 켐프 분견군의 남부를 돌파한 소련 제6군은 곧 SS 기갑군단의 배후인 크라스노그라드를 향해 접근하였다. 게다가 남서전선군 휘하 쿠즈네초프 중장의 제1근위군과 포포프 전차군이 남쪽의 파블로그라드에서 철도망을 차단한 것도 모자라 선두의 전차들은 남부 집단군 사령부 동쪽 약 45km 지점까지 진출하였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히틀러까지 소련군에게 잡혀버릴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히틀러는 극도로 분노해 만슈타인에게 고래고래 화를 냈지만 화낸다고 해결될 상황이 아니었다. 그 때, 제40기갑군단의 감청반이 어마어마한 대어를 낚아왔다. 다름아닌 소련군이 차량 연료와 기타 보급이 고갈상태로 지원을 요청하는 무전을 감청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는 천왕성 작전 이후 연속된 대규모 공세에서 비롯된 일로 이 시점의 소련군은 병참선이 지나치게 신장된 상태였다. 만슈타인은 히틀러에게 해당 첩보를 기반으로 구성한 기동 방어 작전과 하르코프 역탈환 계획을 설명하며 히틀러를 거듭 설득했다. 히틀러는 당연히 탐탁치 않아 했지만, 만슈타인은 일찍이 OKH의 모든 장성들이 마지노선 돌파 계획을 생각할 때 [[하인츠 구데리안|구데리안]]과 낫질작전을 내놓아 프랑스를 6주만에 함락시켰고, [[바르바로사 작전]] 때는 제56기갑군단을 이끌고 북부집단군이 유일하게 작전 목표를 달성, [[크림 반도]]와 케르치 반도 공략을 입안하고 수행했으며, [[세바스토폴]] 공략도 예상보다 더 적은 피해를 입으며 완수해온 전적이 있었다. 그리고 직전의 겨울폭풍 작전에서도 150km를 진격해 제6군을 거의 구출할 뻔했다.[* 겨울폭풍 작전 실패는 50km를 앞두고 돈좌된 것과 그 50km를 돌파할 기력이 없을 만큼 6군이 엉망진창이 된 것이 컸다. 만약 만슈타인이 조금 더 접근했거나 6군이 최후의 돌파를 시도할 수 있을 정도의 기갑장비가 있었다면 정말 스탈린그라드전투는 독일군의 기적적 탈출로 끝났을 것이다.] 프로이센 귀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평소 만슈타인을 아니꼽게 보는 히틀러도 개인감정을 빼고 전공만 따지고 봤을 때 결국 만슈타인을 믿을 수 밖에 없었으며 결국 요청을 들어주게 되었다. 히틀러는 여기에 덤으로 전력이 약화된 7개 기갑, 기갑척탄병 사단을 남부집단군에 배치시켜 주었다. 2월 19일, 보급이 한계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 제1근위군과 제6군은 자포로제를 향해 계속 진격했다. 만슈타인과 제4 항공군 사령관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볼프람 폰리히트호펜]] [[상급대장]][* 그 유명한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붉은 남작]]과는 사촌간이다.]은 히틀러에게 즉시 자포로제를 빠져나갈 것을 요청했고, 히틀러는 간발의 차이로 자포로제 비행장에서 전용기를 타고 베를린으로 떠나는 데 성공한다. 그 동안에도 비행장 주변에 포탄이 떨어지고 있었으니 정말 간발의 차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담으로 주변 인물들의 증언에 따르면 히틀러가 떠나자마자 만슈타인은 히틀러 뒷담을 잔뜩 깠다고 한다.] 이어 만슈타인은 남부집단군 예하의 호트의 제4기갑군, 마켄젠의 제1기갑군, 홀리트 분견군, 켐프 분견군, 하우서의 SS 기갑군단, 리히트호펜의 제4항공군의 재정비를 속행했다. 그 결과 남부집단군은 한달 전 만해도 하루 평균 350소티의 항공 지원이 최대치였으나, 이제는 1,000소티에 달하는 항공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만슈타인의 반격 준비는 점차 갖춰지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